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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응자 (2025 재개봉)] 평범함의 대가, 파시즘의 거울

by 오르봉 2025. 7. 5.

순응과 고립, 인간 본성의 미로

1. 줄거리 – 평범함의 강박, 파시즘의 그림자 속에서

《순응자》(Il Conformista, The Conformist)는 1970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연출한 이탈리아 영화로, 2025년 디지털 리마스터링 재개봉을 통해 다시 관객과 만납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 시대를 배경으로 ‘평범함’에 집착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헤칩니다.

주인공 마르첼로 클레리치(장 루이 트랭티냥)는 로마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정신병원에 입원한 아버지, 권위적인 어머니 밑에서 불안과 소외를 겪으며 성장합니다. 그는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끼고, 평범한 삶, 정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씁니다. 마르첼로는 중산층 집안의 줄리아(스테파니아 샌드렐리)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 무솔리니 정권의 비밀경찰에 자원합니다. 그는 “정상적인 남자”가 되고자 파시스트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첫 임무는 과거 자신의 은사이자 프랑스에서 정치적 망명 중인 반파시스트 콰드리 교수(엔조 타라시오)를 암살하는 것. 마르첼로는 신혼여행을 빙자해 파리로 향하고, 콰드리 교수 부부와 가까워집니다. 특히 교수의 아내 안나(도미니크 상다)에게 이끌리며, 자신의 억압된 욕망과 임무 사이에서 혼란에 빠집니다. 안나는 양성애자로, 그녀의 자유분방함과 관능은 마르첼로가 필사적으로 억압하고 있던 동성애적 욕망까지 자극합니다. 안나와의 관계는 마르첼로가 ‘정상’이라는 환상과 자기 내면의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영화는 플래시백과 현재를 교차시키며, 마르첼로가 왜 이토록 ‘순응’에 집착하게 됐는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죄의식과 자기혐오, 그리고 파시즘이 어떻게 개인의 욕망과 불안을 흡수해가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리노라는 운전기사에게 성적 접근을 받았던 기억, 그를 총으로 쏘았던 사건, 그 후로 평생을 ‘정상’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려 애쓴 과정이 드러납니다. 그는 결혼, 직장, 사회적 성공, 그리고 파시스트가 되는 것까지 모두 ‘남들과 같아지기’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결국 마르첼로는 콰드리 교수와 안나의 암살 현장에서 결정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차 안에서 만가니엘로(가스톤 모신)와 함께 암살을 지켜보며, 안나가 차창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순간에도 그는 미동도 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이 장면은 마르첼로가 자신을 괴롭히던 욕망과 죄의식, 그리고 ‘정상’이라는 환상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순응을 선택하는 순간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파시즘 체제가 무너진 뒤 마르첼로는 거리에서 과거의 운전기사를 다시 만나고, 자신의 죄를 그에게 투사하며 광적으로 몰아붙입니다. 이 장면은 개인의 불안과 사회적 폭력이 어떻게 순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지, 그리고 그 끝에 남는 것은 오직 고립과 자기혐오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순응자》는 한 남자의 내면을 통해 파시즘과 집단주의, 성 정치학, 그리고 인간 본성의 어두운 단면을 날카롭게 해부합니다. 마르첼로는 확고한 신념이나 이념이 아닌, 그저 ‘남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욕망으로 파시즘에 몸을 던집니다. 그는 평범해지기 위해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더욱 고립되고 소외됩니다.

 

2. 촬영 배경 – 미장센의 혁명, 공간과 빛의 언어

《순응자》는 영화사적으로도 손꼽히는 미장센과 영상미로 유명합니다. 촬영감독 비토리오 스토라로는 이 작품을 통해 빛과 어둠, 색채, 공간, 카메라의 움직임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낮은 높이에서 움직이는 카메라,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 철저하게 계산된 트래킹 숏, 완벽한 화면 구도와 대담한 앵글, 그리고 공간과 여백의 미는 관객에게 황홀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로마의 빌라 첼리몬타나 공원, 파리의 댄스홀, 안개 낀 숲, 파시스트 건축의 차가운 직선미와 파리의 낭만적 풍경 등 유럽 각지의 명소가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안개 낀 숲에서 벌어지는 콰드리 교수 암살 장면은 영화사상 가장 장엄하고 스타일리시한 암살 시퀀스로 꼽힙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숲, 쏟아지는 칼날, 고요한 자연과 인간의 폭력이 충돌하는 이 장면은 이후 수많은 영화와 감독들에게 오마주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베르톨루치와 스토라로의 협업은 이후 《마지막 황제》, 《1900년》, 《몽상가들》 등에서 이어지며 현대 영화 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코엔 형제, 박찬욱 등 세계적 거장들이 《순응자》의 장면을 오마주하거나 인용한 사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베르톨루치는 “스토라로는 그림붓이자 빛이었고,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화가의 손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편집 역시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교차시키는 미묘한 구조로, 마르첼로의 내면 풍경과 심리적 균열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합니다. 건축, 패션, 미술, 음악까지 모두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거대한 시각적·청각적 오페라처럼 완성되었습니다. 조르주 들루뤼의 사운드트랙은 몽환적이고 불안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며, 영화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이끕니다.

특히, 파리의 댄스홀 장면에서 마르첼로가 군중 속에 고립된 채 서 있는 모습, 파시스트 건축물의 차가운 공간에서 인물들이 미로처럼 헤매는 장면 등은 ‘순응자’라는 존재의 본질적 고독과 불안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합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빌라 첼리몬타나, 파리의 댄스홀, 안개 낀 숲, 파시스트 건축물 등 실재하는 유럽의 명소들이 영화의 미학과 상징성을 더합니다.

《순응자》의 미장센과 촬영, 편집, 미술, 음악은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영화의 주제와 메시지를 시각적 언어로 완벽하게 구현합니다. 이는 당대에는 시도되지 않았던 혁신적인 촬영·조명 기법으로, 이후 영화, 드라마, 광고, 시각 이미지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3. 총평 – 시대를 초월한 인간 본성의 거울

《순응자》는 단순한 정치 스릴러도, 느와르도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본성과 집단주의, 권력에 대한 순응, 그리고 성 정치학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걸작입니다. 마르첼로는 신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오직 ‘평범함’이라는 강박, 남들과 같아지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파시즘에 몸을 던집니다. 영화는 그가 평범해지기 위해 얼마나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더 소외되고 고립되는지를 섬뜩하게 보여줍니다.

베르톨루치는 “내 영화에는 운명이 없다. 운명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은 개인의 잠재의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순응자》는 마르첼로의 내면에 잠재한 불안, 죄의식, 자기혐오, 그리고 사회적 폭력이 어떻게 ‘순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그는 자신의 욕망과 죄책감을 사회적 폭력, 파시즘, 집단주의에 투사하며, 그 끝에는 오직 고립과 자기파괴만이 남습니다.

이 영화는 파시즘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뿐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본능적 욕망, 불안, 그리고 집단에 순응하고자 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해부합니다. 마르첼로의 선택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반복될 수 있는 ‘순응’의 보편성과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영화는 “누가 정상적인 남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관객 스스로 자신의 내면과 사회적 위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순응자》는 베르톨루치의 연출력, 스토라로의 영상미, 들루뤼의 음악, 그리고 장 루이 트랭티냥의 내면 연기가 어우러져, ‘죽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할 1001편 영화’로 손꼽힙니다. 이번 재개봉은 테크니컬러 리마스터를 통해 원작의 화려한 색감과 영상미를 복원했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심장을 관통하는 메시지와 미학적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 작품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코엔 형제, 박찬욱 등 수많은 거장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과 미장센,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남겼습니다. 《순응자》는 시대를 초월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순응’이라는 이름의 위험성과 보편성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